| r5 | ||
|---|---|---|
| r1 (새 문서) | 1 | [[분류:루이나]][[분류:유고랜드]][[분류:알자미아]][[분류:유고랜드의 폭탄 테러]][[분류:사이클론 작전]][[분류:1997년]] |
| 2 | [include(틀:사건사고)] | |
| 3 | ||
| r2 | 4 | [[파일:영랑호텔 폭탄 테러 현장.jpg]] |
| 5 | ||
| 6 | * 러시아어 명칭: Взрыв в отеле «Ённан» | |
| 7 | * 영어 명칭: Yeongnang Hotel bombing | |
| 8 | * 아랍어 명칭: تفجير فندق يونغنانغ | |
| r1 (새 문서) | 9 | |
| 10 | ||<tablealign=right><bgcolor=#131230><color=#ffffff> '''발생 일시''' [br] (현지시간) || 1997년 4월 12일 토요일 오후 9시 47분 || | |
| 11 | ||<bgcolor=#131230><color=#ffffff> '''사건 종료''' [br] (현지시간) || 1997년 4월 14일 오전 7시 20분[* 구조 작업 종료 및 마지막 시신 수습 시각.] || | |
| r4 | 12 | ||<bgcolor=#131230><color=#ffffff> '''발생 장소''' || [[유고랜드]] 시디벨 카쉬 영랑호텔[* 현 힐튼 영랑, 시디벨아베스 카쉬 팔판통로 6(영랑지구, 1407)][br]{{{-2 [include(틀:국기, 국명=유고랜드)]}}} || |
| r1 (새 문서) | 13 | ||<bgcolor=#131230><color=#ffffff> '''사고 유형''' || [[테러]][* 내부자의 협조를 받은 차량 폭탄 공격.] || |
| 14 | ||<bgcolor=#131230><color=#ffffff> '''발생 주체''' || [[알자미아]][* 알자미아는 공식적으로 책임을 주장하지 않았다. 1997년 5월 루이나 정부는 국가정보국 평가를 근거로 알자미아를 배후로 지목하고 테러조직으로 지정했다.] || | |
| 15 | ||<bgcolor=#131230><color=#ffffff> '''범인''' || 칼리드 무사 알사누시 (주모자, 도주)[br]실행·지원 인원 7명[* 3명 사형, 2명 무기징역, 1명 도주, 1명 군정보국 구금 중 탈주.] || | |
| 16 | ||<bgcolor=#000000> {{{#white '''사망'''}}} || '''41명'''[* 루이나인 17명, 유고랜드인 22명, 제3국인 2명.] || | |
| 17 | ||<bgcolor=#FFBB00> {{{#black '''부상'''}}} || '''213명''' || | |
| 18 | ||
| r2 | 19 | > '''"그날 밤 영랑호텔에서 목숨을 잃은 이들은 루이나의 군인이었고, 유고랜드의 노동자였으며, 무엇보다 하루를 마치고 잠자리에 들려던 사람들이었습니다. 루이나는 이들을 죽인 자들을 찾아낼 것입니다."''' |
| r1 (새 문서) | 20 | > ---- |
| 21 | > 사건 이튿날 [[린드 B. 랭스턴]] [[루이나 대통령|대통령]]의 성명 | |
| 22 | ||
| r2 | 23 | > '''"영랑호텔과 와디 사크르 기지에서 사용된 군용 폭약은 1986년 국가정보국이 사이클론 작전을 통해 공급한 폭약과 같은 생산 로트였다. 정부는 1997년 이 사실을 확인하고도 5년 동안 공개하지 않았다."''' |
| r1 (새 문서) | 24 | > ---- |
| 25 | > 1.19 사건 의회 합동조사위원회 최종 보고서 제7장 (2002) | |
| 26 | ||
| 27 | [목차] | |
| 28 | [clearfix] | |
| 29 | ||
| 30 | == 개요 == | |
| 31 | ||
| r4 | 32 | 영랑호텔 폭탄 테러는 1997년 4월 12일 오후 9시 47분 [[유고랜드]] 시디벨에 있는 영랑호텔에서 일어난 폭탄 테러다. 국제 지하드 조직 [[알자미아]]의 지시를 받은 실행조가 포섭한 호텔 직원의 도움으로 폭약을 실은 화물차를 호텔 지하 납품장에 들여보냈고, 폭발로 호텔 동관 일부가 무너져 41명이 숨지고 213명이 다쳤다. |
| r1 (새 문서) | 33 | |
| 34 | 호텔은 1985년부터 주유고랜드 루이나군의 장교와 군무원, [[플라자 그룹]] 계열 경비업체 직원들이 장기 투숙하던 곳이었다. 그러나 사망자 41명 가운데 루이나인은 17명이었고, 호텔 직원 15명을 포함한 유고랜드인이 22명으로 더 많았다. 나머지 2명은 투숙 중이던 제3국인이었다. | |
| 35 | ||
| 36 | 수사 과정에서 폭약의 성분이 1994년 [[와디 사크르 기지 폭탄 테러]]의 잔류물과 일치한다는 사실이 드러나면서 두 사건이 같은 조직의 소행으로 묶였고, 루이나 정부는 1997년 5월 알자미아를 테러조직으로 지정했다. 두 사건의 폭약은 모두 1980년대 [[사이클론 작전]]으로 루이나 국가정보국이 무자헤딘에게 공급한 군용 폭약이었으나, 정부는 이 사실을 2002년까지 공개하지 않았다. | |
| 37 | ||
| 38 | 유고랜드는 수사를 독점하며 루이나 광역수사국(MIA)의 용의자 접근을 막았고, 유고랜드 군정보국이 핵심 용의자를 먼저 데려간 뒤 그가 구금 중 '탈주'하는 일이 벌어졌다. 실행조 3명은 1998년 유고랜드에서 처형되었지만 공격을 계획한 주모자 칼리드 무사 알사누시는 탈레반 치하의 고랜드로 달아났고, 탈레반은 루이나의 인도 요구를 거부했다. 이 사건은 4년 뒤 [[1.19 사건]]으로 이어지는 경고를 루이나가 어떻게 다루었는지 보여 주는 사례로 거론된다. | |
| 39 | ||
| 40 | == 배경 == | |
| 41 | ||
| r2 | 42 | === 영랑호텔 === |
| 43 | ||
| r4 | 44 | 영랑호텔은 시디벨 카쉬 동쪽 끝에 있던 8층 건물로, 객실 수는 212실이었다. 1936년 라 마베라령 페잔 시절 총독부 영빈관으로 지어졌고, 1941년 유고랜드 건국 뒤 지명을 따와 영랑호텔로 이름을 바꾸었다. 이후 증축을 거쳐 수도에서 가장 오래된 고급 호텔이 되었다. 서관에는 연회장과 식당이, 동관에는 객실과 주방·세탁실·납품장이 있었으며, 동관 지하 납품장은 호텔 뒤편 골목과 경사로로 이어져 있었다. |
| r2 | 45 | |
| 46 | 1985년 4월 [[루이나-유고랜드 상호방위조약]] 체결과 함께 루이나군이 유고랜드에 전개했을 때, 수도에는 루이나군 연락사령부와 각급 연락 장교들이 머물 숙소가 부족했다. 주유고랜드 루이나군 사령부는 같은 해 영랑호텔과 장기 임대 계약을 맺고 동관 4~7층의 객실 96실을 장교·군무원 숙소로 썼다. 1990년대에는 루이나군 시설 경비를 위탁받은 플라자 시큐리티 서비스의 직원들도 같은 층에 투숙했다. 호텔은 민간 영업을 계속했기 때문에 1~3층과 서관에는 일반 투숙객과 연회 손님이 드나들었다. | |
| r1 (새 문서) | 47 | |
| 48 | 호텔 경비는 유고랜드 민간 경비업체가 맡았고, 루이나군은 투숙층 출입만 따로 통제했다. 1994년 이후 루이나군은 기지 출입 통제를 대폭 강화했으나, 이 호텔은 '기지 밖 숙소'로 분류되어 같은 수준의 조치가 적용되지 않았다. | |
| 49 | ||
| 50 | === 와디 사크르 이후 === | |
| 51 | ||
| 52 | 1994년 2월 이브라힘 나쉬디는 「나시르 알 물크 선언」을 발표해 유고랜드에 주둔한 루이나군을 공격하는 것을 모든 무슬림의 의무로 규정했다. 넉 달 뒤인 6월 25일 나시르 알 물크의 루이나 공군 기지 외곽 숙소에서 트럭 폭탄이 터져 루이나군 23명이 숨졌다. 이것이 와디 사크르 기지 폭탄 테러다. 당시 배후는 특정되지 않았고, 사건은 유고랜드 서부의 무장세력 소행이라는 추정 속에 미제로 남았다. | |
| 53 | ||
| r2 | 54 | 와디 사크르 사건 이후 루이나군은 기지 외곽에 차량 차단 구역을 두고 출입 검문을 강화했다. 이 조치로 기지를 직접 노리는 차량 공격은 사실상 불가능해졌으나, 기지 밖에 흩어진 숙소와 연락 사무소는 상대적으로 무방비한 채로 남았다. 1995년 루이나군 내부 감사는 영랑호텔을 포함한 기지 밖 숙소 11곳의 위험도를 '높음'으로 평가하고 기지 안 이전을 권고했으나, 예산과 기지 내 공간 부족을 이유로 이전은 1998년 이후로 미뤄졌다. |
| r1 (새 문서) | 55 | |
| 56 | === 알자미아의 고랜드 이전 === | |
| 57 | ||
| r2 | 58 | 1995년 3월 유고랜드 정부가 나쉬디 등 외국 국적 지도부 11명에게 추방 명령을 내리자 지도부는 서부 국경 산악지대로 옮겨 갔고, 1996년 9월 탈레반이 아바나를 점령한 뒤에는 탈레반의 초청으로 본거지를 고랜드로 옮겼다. 그러나 1988년 창설 이후 유고랜드 안에 뿌리내린 지원망, 곧 사이클론 작전 시절의 훈련소와 숙소에서 맺어진 인맥과 은신처는 그대로 남아 있었다. 영랑호텔 공격은 고랜드로 옮긴 지도부가 유고랜드 안에 남은 지원망을 움직여 벌인 첫 대규모 공격이었다. |
| r1 (새 문서) | 59 | |
| 60 | == 진행 == | |
| 61 | ||
| 62 | === 준비 === | |
| 63 | ||
| r2 | 64 | 공격의 계획은 1996년 가을 고랜드 동부의 알자미아 훈련소에서 시작되었다. 군사위원회 소속 칼리드 무사 알사누시는 와디 사크르 이후 강화된 기지 대신 기지 밖 숙소를 노리기로 하고, 시디벨아베스의 지원 세포에 표적 정찰을 맡겼다. 세포는 1997년 1월 영랑호텔을 표적으로 골랐는데, 루이나 장교들이 한 건물에 몰려 살고 있고 지하 납품장이 건물 바로 밑에 있다는 점이 결정적이었다. |
| r1 (새 문서) | 65 | |
| 66 | 세포는 호텔 납품 검수 담당 직원 사미르 아지즈 바크리를 포섭했다. 바크리는 납품 차량의 출입 시간과 차량 번호를 기록하고 지하 납품장 차단기를 여는 일을 맡고 있었다. 세포는 그의 사촌을 통해 접근해, 루이나 장교들에게 팔 밀주를 들여오는 일이라며 차량 한 대를 검문 없이 들여보내 주는 대가로 1만 5천 달러를 제시했다. 바크리가 처음부터 폭약임을 알았는지는 재판의 핵심 쟁점이 되었다. | |
| 67 | ||
| 68 | 폭약은 질산암모늄과 연료유를 섞은 혼합 폭약 약 600kg에, 기폭을 돕는 군용 플라스틱 폭약 약 40kg을 더한 것이었다. 군용 폭약은 서부 국경지대의 옛 무자헤딘 창고에서 나온 것으로, 나중에 이 폭약이 사건의 성격을 바꾸게 된다. 폭약은 세탁물 납품 업체의 것과 같은 도색을 한 3.5톤 화물차 적재함에 세탁물 자루로 위장해 실렸다. | |
| 69 | ||
| 70 | === 폭발 === | |
| 71 | ||
| 72 | 4월 12일 토요일 오후 9시 31분, 화물차가 호텔 뒤편 골목에서 지하 납품장 경사로로 들어갔다. 토요일 밤 세탁물 납품은 평소에 없던 일이었으나, 차단기 앞에서 바크리가 운전자와 몇 마디를 나눈 뒤 차단기를 열었다. 운전자 하산 압델 라만은 화물차를 동관 바로 아래 납품장 안쪽에 세우고 시한장치를 작동시킨 뒤, 직원 통로를 지나 걸어서 호텔을 빠져나갔다. 바크리는 9시 40분 휴식을 이유로 자리를 떠났다. | |
| 73 | ||
| 74 | 오후 9시 47분 화물차가 폭발했다. 폭발은 지하 납품장의 천장 슬래브를 뚫고 위층으로 솟구쳤고, 동관의 기둥 네 개가 무너지면서 1층부터 4층까지의 동관 중앙부가 아래로 내려앉았다. 지하와 1층에 있던 주방·세탁실의 야간 근무 직원들이 폭발의 직격을 받았고, 루이나 장교들이 투숙하던 4층 일부는 붕괴에 휩쓸렸으며, 5~7층은 외벽과 창이 날아가 객실 안 사람들이 유리와 파편에 다쳤다. 서관 연회장에서는 결혼 피로연이 진행 중이었는데, 천장 일부가 떨어져 하객 3명이 숨졌다. | |
| 75 | ||
| r2 | 76 | 폭발음은 시내 3km 밖까지 들렸고, 영랑구 일대의 창문 수백 장이 깨졌다. 호텔 뒤편 골목에 면한 주택 여섯 채도 부서졌다. |
| r1 (새 문서) | 77 | |
| 78 | === 구조 === | |
| 79 | ||
| 80 | 유고랜드 민방위대와 시디벨아베스 소방대가 9시 58분부터 현장에 도착했고, 10시 40분에는 루이나군 공병대 구조팀이 합류했다. 붕괴된 동관 중앙부는 콘크리트 더미가 3개 층 높이로 쌓여 있어 중장비 투입에 시간이 걸렸고, 2차 붕괴를 우려해 구조는 손으로 잔해를 걷어 내는 방식으로 진행되었다. | |
| 81 | ||
| 82 | 야간 지배인 박정호는 폭발로 왼팔이 부러진 상태에서 투숙객 명부를 들고 구조대를 안내해 층별 생존자 위치를 알려 주었다. 그가 기억으로 짚어 준 객실 배치는 붕괴로 구조가 바뀐 동관에서 생존자를 찾는 데 결정적인 단서가 되었다. | |
| 83 | ||
| 84 | 4층 잔해에 갇혀 있던 루이나 육군 대위 클레르 J. 오베르는 19시간 만인 4월 13일 오후 4시 50분에 구조되었다. 그는 이 사건의 마지막 생존 구조자였다. 이후 구조는 시신 수습으로 바뀌었고, 4월 14일 오전 7시 20분 마지막 시신이 수습되면서 현장 작업이 끝났다. | |
| 85 | ||
| 86 | == 범인 == | |
| 87 | ||
| 88 | === 주모자 === | |
| 89 | ||
| 90 | 칼리드 무사 알사누시는 리비아 출신으로, 1986년 사이클론 작전 시기에 외국인 의용병으로 유고랜드에 들어와 세테트의 바이트 알자미아를 거쳐 전선에 배속되었다. 1988년 알자미아 창설 무렵부터 조직의 군사 부문에서 일했고, 1990년대 중반 군사위원회의 일원이 되었다. 수사기관은 그가 와디 사크르 사건의 계획에도 관여했다고 보았다. | |
| 91 | ||
| r4 | 92 | 알사누시는 폭발 사흘 전인 4월 9일 시디벨을 떠나 나크시에 로스탐을 거쳐 고랜드로 넘어갔다. 루이나는 1997년 6월 고랜드를 장악한 탈레반에게 나쉬디와 알사누시의 인도를 요구했으나, 탈레반은 "증거가 제시되지 않았다"며 거부했다. 그는 2001년 11월 루이나-고랜드 전쟁 초기 칸다하르 인근의 공습으로 사망한 것으로 추정되지만, 시신은 확인되지 않았다. |
| r1 (새 문서) | 93 | |
| 94 | === 실행·지원 인원 === | |
| 95 | ||
| 96 | ||<tablealign=center><tablewidth=560><tablebordercolor=#131230><rowbgcolor=#131230><rowcolor=#ffffff> 이름 || 역할 || 결과 || | |
| r4 | 97 | || 유세프 알하킴 || 시디벨 세포장 || 사형 (1998) || |
| r1 (새 문서) | 98 | || 하산 압델 라만 || 화물차 운전 || 사형 (1998) || |
| 99 | || 사미르 아지즈 바크리 || 내부자 (호텔 직원) || 사형 (1998) || | |
| 100 | || 와엘 슈크리 || 폭약 조립 || 무기징역 || | |
| 101 | || 오마르 나디 || 은신처 제공 || 무기징역 || | |
| 102 | || 아흐마드 주마 칸 || 폭약 조달 || 군정보국 구금 중 탈주 || | |
| 103 | || 타리크 바크리 || 내부자 포섭 || 고랜드 도주 || | |
| 104 | ||
| r4 | 105 | 세포장 유세프 알하킴은 시디벨에서 자동차 정비소를 운영하던 아랍계 유고랜드인으로, 1980년대 후반 무자헤딘 훈련소에서 정비병으로 일한 경력이 있었다. 운전자 하산 압델 라만은 이집트 출신의 옛 의용병이었다. |
| r1 (새 문서) | 106 | |
| r2 | 107 | 폭약을 조달한 아흐마드 주마 칸은 사비에트-고랜드 전쟁 때 넘어온 파슈툰 난민 가정 출신으로, 1980년대 후반 군정보국이 관리하던 무자헤딘 보급 창고에서 일했다. 그는 전쟁이 끝난 뒤에도 서부 국경지대에 남은 옛 창고의 재고를 빼돌려 무장세력에 팔아 왔고, 영랑호텔에 쓰인 군용 폭약도 그가 넘긴 것이었다. |
| r1 (새 문서) | 108 | |
| 109 | === 내부자 논란 === | |
| 110 | ||
| r4 | 111 | 호텔 직원 사미르 아지즈 바크리는 가자우에트 출신으로, 1993년부터 영랑호텔에서 일했다. 그는 체포 직후 진술에서 사촌 타리크 바크리의 부탁으로 "루이나 장교들에게 팔 밀주를 실은 차"를 들여보냈을 뿐이며 폭약인 줄은 몰랐다고 주장했다. |
| r1 (새 문서) | 112 | |
| 113 | 검찰은 바크리가 평소와 달리 토요일 밤 납품을 받아들였고, 폭발 7분 전에 자리를 떠났으며, 받은 돈이 밀주 반입의 대가로는 지나치게 많았다는 점을 들어 그가 알고 있었다고 주장했다. 법원은 검찰의 주장을 받아들였다. 반면 바크리를 포섭한 사촌 타리크가 고랜드로 달아나 증언할 수 없었고, 휴식 시간 이탈은 그 시각의 정해진 교대였다는 동료 직원들의 진술도 있었다. 바크리가 몰랐을 가능성은 지금도 유고랜드 인권 단체들이 제기하는 쟁점이다. | |
| 114 | ||
| 115 | == 피해자 == | |
| 116 | ||
| 117 | ||<tablealign=center><tablewidth=400><tablebordercolor=#131230><rowbgcolor=#131230><rowcolor=#ffffff> 구분 || 사망 || | |
| 118 | || 루이나군 장교 || 8명 || | |
| 119 | || 루이나군 군무원 || 5명 || | |
| 120 | || 플라자 시큐리티 서비스 직원 || 4명 || | |
| 121 | || 호텔 직원 || 15명 || | |
| 122 | || 유고랜드인 하객·투숙객·주민 || 7명 || | |
| 123 | || 제3국인 || 2명 || | |
| 124 | || '''합계''' || '''41명''' || | |
| 125 | ||
| 126 | === 사망 === | |
| 127 | ||
| 128 | [[파일:앙리 페로.jpg]] | |
| 129 | 주유고랜드 루이나군 연락사령부 작전참모 앙리 M. 페로 육군 중령(향년 44세). | |
| 130 | ||
| 131 | 동관 4층에 투숙하던 페로는 한 달 뒤인 5월 본국 복귀가 예정되어 있었다. 사건 당일 저녁 콜마르의 가족과 통화하면서 "다음 달이면 이 호텔 밥도 끝"이라고 말한 것이 마지막 통화였다. 그의 부인 마들렌 페로는 이후 루이나 측 유족회를 이끌었고, 2002년 폭약의 출처가 공개되자 "남편은 우리나라가 만들어 보낸 폭약에 죽었다"는 성명을 냈다. | |
| 132 | ||
| 133 | 주유고랜드 루이나군 군무원 엘렌 R. 마티외(향년 31세). | |
| 134 | ||
| 135 | 아랍어 통역사였던 마티외는 루이나군과 시디벨아베스 경찰 사이의 연락 업무를 맡았다. 호텔 직원 자녀들에게 주말마다 루이나어를 가르쳐 직원들 사이에서 '토요일 선생님'으로 불렸고, 사건 당일에도 저녁 수업을 마치고 객실로 올라간 직후 폭발이 일어났다. | |
| 136 | ||
| 137 | 플라자 시큐리티 서비스 직원 다니엘 K. 브륄(향년 38세). | |
| 138 | ||
| 139 | 해병대 부사관 출신으로 1995년 플라자 시큐리티 서비스에 입사해 루이나군 연락사령부 시설 경비를 맡았다. 유족은 회사가 직원들을 위험도 '높음'으로 평가된 기지 밖 호텔에 묵게 했다며 소송을 냈고, 2000년 비공개 조건으로 합의했다. | |
| 140 | ||
| 141 | [[파일:라일라 하다드.jpg]] | |
| 142 | 최연소 희생자 라일라 하다드(향년 19세). | |
| 143 | ||
| 144 | 나크시에 로스탐의 실향민 가정 출신으로, 남동생의 학비를 벌기 위해 1996년부터 호텔 세탁실에서 야간 근무를 했다. 폭발 지점과 벽 하나를 사이에 둔 지하 세탁실에 있었다. 그녀가 내부자 바크리와 같은 고향 출신이라는 사실은 재판 과정에서 알려져 유고랜드 사회에 적지 않은 충격을 주었다. | |
| 145 | ||
| 146 | 호텔 주방 조리장 김순례(향년 52세). | |
| 147 | ||
| r2 | 148 | 1964년 웨스타시아 지배기에 주방 보조로 들어와 33년 동안 영랑호텔의 주방을 지켰다. 직원들 사이에서 '호텔의 어머니'로 불렸으며, 루이나 장교들이 한국식 반찬을 따로 주문할 만큼 이름이 알려져 있었다. 폭발 당시 다음 날 아침 식사를 준비하고 있었다. |
| r1 (새 문서) | 149 | |
| 150 | 플로렌시아인 수자원 기술자 앙투안 L. 소렐(향년 47세). | |
| 151 | ||
| 152 | 플로렌시아 정부의 유고랜드 상수도 원조 사업에 파견되어 동관 2층에 투숙 중이었다. 루이나군과 아무런 관계가 없는 일반 투숙객이었다. 함께 숨진 또 한 명의 제3국인은 라 마베라 국적의 직물 상인이었다. | |
| 153 | ||
| 154 | === 부상 === | |
| 155 | ||
| 156 | [[파일:박정호.jpg]] | |
| 157 | 야간 지배인 박정호(당시 45세). | |
| 158 | ||
| 159 | 폭발로 왼팔이 부러지고 얼굴에 파편이 박힌 상태에서 투숙객 명부를 들고 구조대를 안내했다. 무너진 동관의 객실 배치를 기억으로 짚어 생존자 11명의 위치를 찾는 데 도움을 주었고, 다음 날 새벽 쓰러져 병원으로 옮겨졌다. 루이나 정부는 1997년 7월 그에게 외국인에게 수여하는 시민 공로 훈장을 주었다. 그는 내부자 바크리를 직접 채용한 상사이기도 해서, 훈장 수여 이후에도 오랫동안 죄책감을 호소했다. | |
| 160 | ||
| 161 | [[파일:클레르 오베르.jpg]] | |
| 162 | 루이나 육군 대위 클레르 J. 오베르(당시 27세). | |
| 163 | ||
| 164 | 4층 객실이 내려앉으면서 무너진 바닥과 침대 틀 사이에 19시간 동안 갇혀 있다가 구조되었다. 오른쪽 다리를 절단했고, 1999년 전역했다. 2002년 1.19 사건 의회 합동조사위원회에 증인으로 나와 1995년 감사의 이전 권고가 이행되지 않은 경위를 따져 물었다. | |
| 165 | ||
| 166 | == 수사와 재판 == | |
| 167 | ||
| 168 | === 관할권 다툼 === | |
| 169 | ||
| r4 | 170 | 사건 이튿날 루이나는 광역수사국(MIA) 수사관과 법과학 인력 46명을 시디벨로 보냈다. 그러나 유고랜드 정부는 사건이 유고랜드 영토의 민간 호텔에서 일어난 유고랜드 국내 형사 사건이라며 수사를 경찰청 특별수사본부로 일원화하고, 루이나 수사관에게는 '연락 및 자문' 지위만 주었다. |
| r1 (새 문서) | 171 | |
| 172 | 루이나는 호텔 동관 4~7층이 [[루이나-유고랜드 주둔군지위협정]]에 따라 주둔군이 사용하는 시설로 지정되어 있었던 만큼 루이나도 수사에 참여할 권리가 있다고 주장했다. 유고랜드는 폭발이 일어난 곳이 지정 시설이 아닌 지하 납품장이며 피의자는 모두 유고랜드 영토 안의 민간인이라고 맞섰다. 결국 광역수사국 수사관들은 용의자를 한 번도 직접 신문하지 못했고, 유고랜드 경찰이 넘겨주는 신문 요약본만 받아 볼 수 있었다. | |
| 173 | ||
| 174 | === 검거 === | |
| 175 | ||
| 176 | 유고랜드 경찰은 사건 당일 밤 자리를 떠난 바크리를 4월 13일 새벽 자택에서 체포했다. 그의 진술을 실마리로 4월 15일 세포장 알하킴의 정비소가 수색되었고, 알하킴과 와엘 슈크리, 오마르 나디가 차례로 체포되었다. 운전자 압델 라만은 4월 19일 나시르 알 물크의 버스 터미널에서 검거되었다. | |
| 177 | ||
| 178 | === 아흐마드 주마 칸의 '탈주' === | |
| 179 | ||
| 180 | 수사의 결정적인 고리는 폭약을 조달한 아흐마드 주마 칸이었다. 경찰은 4월 16일 그의 거처를 확인하고 체포에 나섰으나, 현장에 도착했을 때 칸은 이미 몇 시간 전 군정보국에 연행된 뒤였다. 군정보국은 칸이 "서부 국경지대 무장세력과 관련된 별개 사건"의 피의자라며 경찰에 넘기지 않았다. | |
| 181 | ||
| 182 | 칸은 군정보국 시설에 구금된 채 경찰 수사관의 접견을 두 차례만 허락받았고, 루이나 수사관은 한 번도 그를 만나지 못했다. 그리고 6월 2일 군정보국은 칸이 이송 중 탈주했다고 발표했다. 칸은 이듬해 고랜드 동부의 알자미아 훈련소에서 목격되었다는 첩보가 있었으나 이후 행방은 알려지지 않았다. | |
| 183 | ||
| 184 | 칸은 1980년대 후반 군정보국이 관리한 사이클론 작전 보급 창고에서 일했던 인물이었다. 그가 옛 창고 재고의 유출 경로와 그 과정에 관여한 군정보국 인사들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군정보국이 그를 먼저 데려가 입을 막았다는 의혹이 제기되었다. 군정보국은 이를 부인했고, 유고랜드 정부의 내부 조사 결과는 공개되지 않았다. 이 사건은 2011년 [[오리온 작전]] 이후 제기된 군정보국의 나쉬디 비호 의혹을 거슬러 올라갈 때 가장 먼저 거론되는 전례가 되었다. | |
| 185 | ||
| 186 | === 재판 === | |
| 187 | ||
| 188 | 재판은 1997년 11월 3일 유고랜드 국가안보특별법원에서 시작되었다. 1998년 2월 20일 법원은 알하킴, 압델 라만, 바크리에게 사형을, 슈크리와 나디에게 무기징역을 선고했다. 상소는 4월 기각되었고, 세 사람은 1998년 6월 18일 처형되었다. 루이나 정부는 판결과 집행에 대해 별도의 입장을 내지 않았다. | |
| 189 | ||
| 190 | 재판은 주모자 알사누시와 폭약 조달자 칸이 빠진 채 진행되었기 때문에, 공격이 알자미아 지도부의 지시였다는 사실은 피고인들의 진술로만 뒷받침되었다. 유고랜드 법원은 판결문에서 "외국 테러 조직의 지시를 받은 범행"이라고만 적고 알자미아의 이름을 쓰지 않았다. | |
| 191 | ||
| 192 | == 폭약의 출처 == | |
| 193 | ||
| 194 | === 와디 사크르와의 연결 === | |
| 195 | ||
| 196 | 유고랜드가 수사를 독점한 상황에서, 루이나가 독자적으로 확보한 증거는 구조 작업에 참여한 루이나군 공병대가 4층 잔해에서 수거한 폭발 잔류물이었다. 광역수사국 법과학연구소는 이 잔류물에서 군용 플라스틱 폭약에 생산 단계에서 넣는 식별용 화학 표지를 찾아냈다. | |
| 197 | ||
| r2 | 198 | 연구소는 이 표지를 1994년 와디 사크르 사건 당시 루이나 공군 수사단이 보관해 둔 잔류물 표본과 대조했고, 두 표지가 같은 생산 로트의 것이라는 결과를 1997년 4월 30일 보고했다. 미제로 남아 있던 와디 사크르 사건이 이로써 영랑호텔 사건과 같은 조직의 소행으로 묶였고, 국가정보국은 이 결과를 근거의 하나로 삼아 5월 알자미아를 테러조직으로 지정하는 평가서를 냈다. |
| r1 (새 문서) | 199 | |
| 200 | === 사이클론 작전 === | |
| 201 | ||
| 202 | 생산 로트를 추적한 결과는 더 불편한 사실을 가리켰다. 두 사건의 군용 폭약은 루이나 국영 화약창이 1986년 생산한 「86-C」 로트로, 국가정보국이 1986~1987년 [[사이클론 작전]]을 통해 유고랜드 군정보국에 인도한 물량에 속해 있었다. 1986년 4월 관여 부인 원칙이 폐기된 뒤 공급된 루이나 원산 폭약이었다. | |
| 203 | ||
| r2 | 204 | 정부는 이 사실을 공개하지 않았다. 1997년 5월 국가안보회의는 "두 사건의 폭약 성분이 일치한다"는 사실만 발표하기로 하고, 생산 로트와 공급 경로는 기밀로 분류했다. 1999년 《르 마탱》이 "영랑호텔의 폭약은 루이나제"라고 보도했을 때도 정부는 "확인할 수 없다"는 입장을 유지했다. |
| 205 | ||
| 206 | 사실이 공식 확인된 것은 2002년 1.19 사건 의회 합동조사위원회의 최종 보고서였다. 보고서는 같은 장에서 사이클론 작전 물자가 외국인 의용병 시설로 흘러간 「세테트 배분 장부」를 함께 다루면서, 영랑호텔의 폭약을 "사이클론 작전의 역풍이 물리적 형태로 확인된 첫 사례"로 규정했다. | |
| r1 (새 문서) | 207 | |
| 208 | == 반응 == | |
| 209 | ||
| 210 | === 루이나 === | |
| 211 | ||
| 212 | [[린드 B. 랭스턴]] 대통령은 4월 13일 성명을 내고 희생자들을 애도했으며, 사흘간 관공서와 군 시설에 조기를 게양하도록 했다. 루이나인 희생자 17명의 유해는 4월 16일 벨포르 인근 공군 기지로 돌아왔고, 랭스턴은 활주로에서 유해를 직접 맞았다. | |
| 213 | ||
| r2 | 214 | 의회는 곧바로 기지 밖 숙소 문제를 따지기 시작했다. 5월 하원 국방위원회 청문회에서 1995년 내부 감사가 영랑호텔을 위험도 '높음'으로 평가하고 기지 안 이전을 권고했던 사실이 드러났고, 국방장관은 "권고를 이행하지 못한 책임은 국방부에 있다"며 사과했다. 주유고랜드 루이나군 사령관은 6월 교체되었다. |
| r1 (새 문서) | 215 | |
| 216 | 5월 9일 루이나 정부는 국가정보국의 평가를 근거로 알자미아(법률상 명칭 「알후라 알자미아」)를 테러조직으로 지정했다. 6월에는 탈레반에 나쉬디와 알사누시의 인도를 요구했으나 거부당했다. 루이나는 탈레반 정권을 승인하지 않았고, 이후 군사적 보복은 검토 단계에서 멈추었다. 1.19 사건 이전까지 루이나의 대응은 국외 정보 수집과 지도부 추적에 머물렀다. | |
| 217 | ||
| 218 | === 유고랜드 === | |
| 219 | ||
| 220 | 유고랜드 정부는 사흘간의 국가 애도 기간을 선포했다. 희생자 가운데 유고랜드인이 더 많았다는 사실은 유고랜드 사회에 두 갈래의 반응을 낳았다. 한쪽에서는 외국 테러 조직이 유고랜드 노동자들을 '부수적 피해'로 죽였다는 분노가 일었고, 다른 한쪽에서는 루이나군이 수도 한복판의 민간 호텔에 머물면서 유고랜드인들을 표적의 한가운데로 끌어들였다는 비판이 나왔다. | |
| 221 | ||
| r4 | 222 | 보상 문제는 오랫동안 갈등의 불씨가 되었다. 루이나인 희생자의 유족은 군 사망 보상금과 플라자 그룹의 보험금을 받았으나, 호텔 직원을 비롯한 유고랜드인 희생자의 유족은 유고랜드 정부의 소액 위로금 외에는 아무것도 받지 못했다. 1997년 7월 호텔 직원 유족들이 시디벨의 루이나군 연락사령부 앞에서 농성을 벌였고, 루이나 정부는 1999년 법적 책임을 인정하지 않는 조건으로 유고랜드인과 제3국인 희생자 24명의 유족에게 1인당 2만 달러의 위로금을 지급했다. |
| r1 (새 문서) | 223 | |
| 224 | === 알자미아 === | |
| 225 | ||
| r4 | 226 | 알자미아는 공격에 대한 책임을 공식적으로 주장하지 않았다. 나쉬디는 1997년 8월 고랜드에서 걸프 지역 기자와 가진 인터뷰에서 "카쉬와 와디 사크르의 젊은이들은 의무를 다했다"며 공격을 칭송하면서도 자신이 지시했느냐는 질문에는 답하지 않았다. 1998년 2월 나쉬디와 알자와히리가 발표한 「전선 선언」은 두 사건을 루이나군에 대한 공격의 모범으로 거론했다. |
| r1 (새 문서) | 227 | |
| 228 | === 국제 반응 === | |
| 229 | ||
| 230 | 플로렌시아는 자국 기술자의 희생에 유감을 표하고 유고랜드에서 진행 중이던 원조 사업 인력을 일시 철수시켰다. 라 마베라와 NLTO 회원국 대부분이 테러를 규탄했다. 사비에트는 테러를 규탄하면서도 "외국군 주둔이 지역의 긴장을 키우고 있다"는 논평을 덧붙였다. | |
| 231 | ||
| 232 | == 영향 == | |
| 233 | ||
| 234 | === 기지 내 수용 원칙 === | |
| 235 | ||
| r2 | 236 | 사건 이후 주유고랜드 루이나군은 모든 장병과 군무원, 계약 인력을 기지 안에 수용한다는 원칙을 세웠다. 영랑호텔을 포함한 기지 밖 숙소 11곳은 1998년 3월까지 모두 비워졌다. 기지 안 숙소 신축 공사는 1997년 9월 약 3억 4천만 달러에 발주되었는데, 이 공사를 따낸 것은 같은 해 플라자 그룹이 항만 건설 부문을 떼어 세운 플라자 건설이었다. 플라자 건설이 유고랜드와 고랜드의 루이나군 기지 시설 상당수를 짓게 되는 출발점이 이 계약이었다. |
| r1 (새 문서) | 237 | |
| 238 | 이 원칙은 루이나군을 테러로부터 보호했지만, 동시에 루이나군과 유고랜드 사회의 접점을 크게 줄였다. 기지 밖으로 나오지 않게 된 루이나군을 유고랜드에서는 '담장 안의 군대'라고 부르기 시작했다. | |
| 239 | ||
| 240 | === 1.19 사건의 전조 === | |
| 241 | ||
| r2 | 242 | 2002년 1.19 사건 의회 합동조사위원회는 영랑호텔 사건을 와디 사크르(1994), 제7국경감시소 습격(1999)과 함께 1.19 이전에 쌓인 '경고' 가운데 하나로 분석했다. 위원회가 특히 문제 삼은 것은 1997년 국가정보국 평가서의 결론이었다. 평가서는 알자미아를 테러조직으로 지정하면서도 그 위협을 "유고랜드 주둔 루이나군에 대한 현지화된 위협"으로 규정하고, 루이나 본토에 대한 공격 가능성은 낮다고 판단했다. 4년 뒤 그 판단은 틀린 것으로 드러났다. |
| r1 (새 문서) | 243 | |
| 244 | === 군정보국 의혹의 전례 === | |
| 245 | ||
| 246 | 아흐마드 주마 칸의 '탈주'는 유고랜드 군정보국이 사이클론 작전 시절부터 이어 온 무장세력과의 관계를 감추려 한다는 의혹의 첫 공개 사례였다. 이후 2011년 나쉬디가 유고랜드 육군 산악훈련소 인근에서 사살되자 이 사건이 다시 소환되었고, 칸을 넘겨주지 않은 1997년의 군정보국과 오리온 작전에서 배제된 2011년의 군정보국은 같은 의혹의 두 장면으로 묶여 거론되고 있다. | |
| 247 | ||
| 248 | === 루이나-유고랜드 수사 공조 === | |
| 249 | ||
| 250 | 관할권 다툼의 반성으로 두 나라는 1998년 10월 「주둔군 관련 테러 사건의 공동 수사에 관한 양해각서」를 맺었다. 양해각서는 루이나군 인원이 피해자인 테러 사건에서 루이나 수사관이 유고랜드 수사관과 함께 피의자 신문에 참여할 수 있도록 했다. 다만 군정보국이 구금한 피의자는 적용 대상에서 빠져 있어, 칸 사건과 같은 일을 막지 못한다는 비판을 받았다. | |
| 251 | ||
| 252 | == 기타 == | |
| 253 | ||
| r4 | 254 | * 영랑호텔의 동관은 1997년 철거되었고, 호텔은 3년 넘게 문을 닫았다가 2001년 서관만으로 힐튼 영랑으로 다시 문을 열었다. 동관 자리에는 희생자 41명의 이름을 한국어, 아랍어, 루이나어로 새긴 추모벽이 세워졌다. |
| r1 (새 문서) | 255 | * 매년 4월 12일 오후 9시 47분 추모벽 앞에서 추모식이 열린다. 2001년까지는 루이나군과 유고랜드 정부가 따로 추모식을 열었으나, 2002년부터 합동 추모식으로 바뀌었다. |
| 256 | * 추모벽의 이름은 국적이나 가나다순이 아니라 사망 당시 있던 층의 순서대로 새겨져 있다. 지하 세탁실의 하다드와 1층 주방의 김순례가 맨 앞에, 4층의 루이나 장교들이 그 뒤에 온다. 국적별로 나누자는 루이나 측 제안을 호텔 직원 유족회가 거부한 결과다. | |
| 257 | * 내부자 바크리의 가족은 지금도 그가 폭약인 줄 몰랐다고 주장한다. 2009년 유고랜드 인권 단체가 사후 재심을 청구했으나 기각되었다. | |
| 258 | * 사건 당일 서관 연회장의 결혼 피로연에서 숨진 하객 3명 가운데 1명은 신랑의 아버지였다. 신랑과 신부는 1998년 같은 날 같은 호텔 서관에서 다시 피로연을 열려 했으나 호텔이 문을 닫아 다른 곳에서 열었고, 2001년 재개장 첫날 투숙객이 되었다. | |
| 259 | ||
| 260 | == 관련 문서 == | |
| 261 | ||
| 262 | * [[알자미아]] | |
| 263 | * [[와디 사크르 기지 폭탄 테러]] | |
| 264 | * [[제7국경감시소 습격]] | |
| 265 | * [[1.19 사건]] | |
| 266 | * [[사이클론 작전]] | |
| 267 | * [[오리온 작전]] | |
| 268 | * [[루이나-유고랜드 주둔군지위협정]] | |
| 269 | * [[플라자 그룹]] |